산야스에 관한 오쇼 말씀

당신은 오쇼가  산야스에 관해 말씀하신 서로 다른 강연에서 발췌한 것들을 편집해 놓은 것을 여기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발췌글들은 말해진 순서대로 수록되어 있는데, 끝 부분에는 The Last Testament 에서 발췌한 강연이 수록되어 있다.

 “자기무지의 견지에서 삶을 바라보는 것이 윤회, 즉 이 세상이다. 자기를 아는 견지에서 삶을 바라보는 것이 산야스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에게 자신이 산야스를 받았다고 말할 때마다, 전체적인 것이 나에겐 매우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산야스를 받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적대적인 행동이라는 인상을 낳는다. 산야스가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자신이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와 같이 받았다고 알고 있는 것이 진짜 알고 있는 것일까? 받은 산야스는 산야스가 아니다.

그대는 진실을 은폐하는 가면을 쓸 수 없다. 진실은 그대 안에서 일깨워져야만 한다. 산야스는 태어난다. 그것은 이해를 통해서 온다. 그러한 이해 속에서 우리는 계속 변형된다. 우리의 이해가 변화할 때, 아무런 노력 없이도 우리의 견해가 바뀌고 우리의 행동이 바뀌어진다. 세상은 그대로 변하지 않는 채이지만, 산야스는 점차적으로 우리 안에서 태어난다. 산야스는 ‘나는 몸일 뿐만 아니라, 나는 또한 영혼이다.’라는 자각이다. 이러한 앎과 더불어 우리 안의 무지와 집착이 사라진다. 세상은 밖에 있었고, 그것은 여전히 계속해서 거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세상에 대한 집착이 없어질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안에는 세상도 없어질 것이고 윤회도 없어질 것이다.”

Osho, The Perfect Way,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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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야스로의 ‘입구’는 거기 있었지만, ‘출구’는 없었다.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나올 수는 없었다. 그러나 출구가 없는 곳은 천국이라 할지라도 지옥이 된다 – 그것은 감옥이 된다. 그대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낫다, ‘그렇다, 만약 어떤 산야신이 정말 떠나고 싶어 한다면, 다른 누군가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떠나도 된다.’ 그러나 그대는 그를 비난할 것이고 그를 모욕할 것이다 – 그 뒤에 비난이 따를 것이다.  

그것이 바로 누군가가 산야스를 받을 때마다  수많은 광고와 겉치레로 그것을 안내하는 수법을 우리가 만들어낸 이유다.; 누군가가 산야스를 받을 때마다,  우리는 굉장한 산야스 행사 음악을 연주한다; 누군가가 산야스를 받을 때마다, 우리는 그에게 화환을 걸어주고, 그를 칭찬하고, 그에게 대단한 존경을 표한다. 마치 굉장한 행사라도 열리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도 아낌없이 보여주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러한 보여줌에는 또다른 면이 있다. 이 산야신은 만약 그가 내일 산야스를 철회하면 자신이 오늘 화환의 세례를 받은 것과 똑같이 돌과 신발이 그에게 던져질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다름 아닌 바로 그 똑같은 사람들에 의해 일어날 것이다. 사실 그에게 화환을 걸어주면서 이 사람들은 그에게 결코 산야스를 철회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의 경우, 그대가 존경을 받은 것과 똑같이 모욕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산야스의 기쁨을 맛볼 수도 있었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기쁨을 박탈 당한 채로 그냥 지내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생을 거듭하면서도 그것을 결코 결정할 수 없다…평생 전념해야 하는 것에 대한 결정은 너무 큰 일이고 너무 어려운 문제다. 게다가 우리는 결정할 권리도 없다.

그러니까 나의 비전은 산야스는 항상 주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대는 어느 때라도 그것을 철회할 수 있다. 누가 그대의 길을 가로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대는 산야스를 이미 받았으며, 이제 그대는 그것을 떠나려 하고 있다. 그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이 일에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대만이 그것에 결정 인자이며 이것은 그대 자신의 결정이다. 그것은 다른 그 누구의 관심사도 아니며, 또한 그것에 다른 그 누구의 승인도 필요하지 않다. 산야스는 개인적인 것이며, 그것은 당사자 자신의 결정이다. 어떤 사람은 오늘 산야스를 받았다가 내일 그것을 버린다. 그대는 어떤 사람이 산야스를 받았다고 찬사를 보낼 필요도 없고, 그가 그것을 버렸다고 그를 비난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그대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또한 기억하라, 지금까지 산야스는 항상 어떤 스승과 관련되어져 왔다는 것을: 어떤 스승은 입문식을 한다. 산야스는 다른 누군가가 그대에게 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산야스는 누군가가 받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주는 사람은 없다. 혹은, 존재계를 제외하고 다른 그 누가 산야스를 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제발 저를 입문시켜주세요,’라고 말하면, 나는 그에게 말한다, ‘어떻게 내가 그대를 입문시킬 수 있겠는가? 나는 단지 증인이 될 수 있을 뿐. 그대가 신으로부터 받는 입문식; 그대가 존재계로부터 받는 입문식; 나는 기껏해야 그것의 증인이 될 수 있을 뿐. 이러한 특별한 일이 일어났을 때 내가 거기 있었다는 그런 것. 입문식에는 오로지 이것밖에 없다. 스승에 소속된 산야스는 반드시 파벌적으로 된다. 스승에 소속된 산야스는 결코 자유를 가져다줄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속박을 가져다 줄 뿐이다…

나는 그들의 산야스 입문식에 그들의 스승이 아니라 오로지 증인이 될 것이다. 사실, 산야스는 그들과 존재계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의 사항일 것이다. 누군가가 산야스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그렇게 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산야스 입문을 위한 그 어떤 의식도 없을 것이다….

내가 ‘나의 산야신들’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말실수가 아니었다. 나의 혀는 이상하게도 거의 실수를 하지 않는다. 한 친구가 ‘너의 산야신들’이라고 처음 말했던 때, 나는 그것을 부인하며 말했다, ‘“나의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러나 나의 의도는 달랐다. 그 의도는 어떻게 산야신이 나의 것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 거였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다시 말했을 때, 그것은 말실수가 아니었다. 나는 ‘나의 산야신들’이라고 말했다. 산야신은 나의 것이 될 수 없지만 나는 분명 산야신에 속해 있다…..”

오쇼,

다시 한번 어떤 교파가 당신을 중심으로 개발되지 않겠습니까?

“아니다, 교파가 개발되진 않을 것이다. 어떤 교파가 개발되기 위해서는 몇 개의 근본적인 필수조건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개발되지 않을 것이다.

먼저 스승이 필요하고 경전이 필요하고 교리가 필요하며, 몇 개의 형용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뿐만 아니라, 또한 이것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든지 간에 그것은 완전히 틀렸으며 오로지 이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주장을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아무런 형용사도 없는 자를 산야신이라 부르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형용사 없이 교파를 형성하기는 어렵다. 교파는 형용사 없이 형성될 수 없다. 나는 그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 자를 산야신이라 부르고 있다. 어떻게 종교 없이 교파를 형성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어떤  종교적인 경전도 없고, 그 어떤 종교적인 스승도 없고, 그 어떤 절도, 모스크도, 교회도, 구루드바라(자이나교의 절)도 없는 자를 산야신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교파가 형성되기 어렵다.

우리는 그 어떤 교파도 형성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파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많이 종교성에 해를 끼쳐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종교는 교파가 끼친 것만큼 종교성에 해를 끼치진 않았다.”

Osho, Krishna: The Man and His Philosophy,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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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야스는 무엇보다도 용기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 개인성의 선언이며, 자유의 선언이며, 그대가 더 이상 군중들의 광기나 군중들의 심리의 일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가 우주적으로 되어간다는 선언이다; 그대는 그 어떤 국가, 그 어떤 교회, 그 어떤 인종, 그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다.”

Osho, Finger Pointing to the Moon, 7장 
(이 제목은 더 이상 Osho의 요청에 따라 제공되지 않습니다)

 

“내가 ‘산야신이 되라. 그냥 되라.’라고 말할 때 이것이 바로 내가 뜻하는 바다.

그대의 황토색 로브, 그대의 말라 – 이것들은 규칙들이다. 이것은 게임이다. 이것이  내가 의미하는 진짜 산야스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대를 규칙 없는 삶으로 이끌기 전 일시적인 기간 동안 규칙을 필요로 했을 게임들에 그대는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이 규칙과 게임의 세계로부터 저 규칙과 게임이 없는 세계로 이동하기 위하여, 다리를 건너야만 한다.

그대의 적황색 옷과 그대의 말라는 단지 그 일시적인 기간 동안을 위한 것이다. 그대는 즉각적으로 규칙들을 버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새로운 규칙들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로브가 그대의 산야스가 아니라는, 그대의 말라가 그대의 산야스가 아니라는, 그대의 새로운 이름이 그대의 산야스가 아니라는 사실에 전적으로 깨어 있으라.  

이름이 없을 때, 그대가 무명이 될 때, 산야스가 존재할 것이다. 그땐 아무런 규칙도 없을 것이다. 그때 그대는 너무나 평범해져서 그대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Osho, A Bird on the Wing,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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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 그것이 현실이다. 소속되고 싶어하는 모든 것은 믿을 수 없다. 소속되려는 바로 그 생각이 조직을 만든다; 소속되려는 바로 그 생각이 교회를 만든다 – 그대는 홀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대는 군중들 속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한다. 산야신이란 자신이 홀로임을 받아들인 자이다. 그것이 기본이다. 산야신이 됨으로써, 그대는 어떤 조직의 일원이 되지 않는다 – 이것은 조직이 전혀 아니다. 산야신이 됨으로써, 그대는 인간은 홀로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한 용기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 역시 아주 기본이다; 그 사실을 회피할 방도가 없다. 그것은 죽음 만큼이나 근본적이다. 사실, 죽음은 그대가  과거 혼자였다는, 그리고 지금 그대가 홀로라는 사실을 그대에게 일깨워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Osho, The Divine Melody,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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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나의 친한 친구가 서양에서 산야스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당신에게  보냈다가답장을 받기 전에 그녀는 여기로 와서여기에서 산야스를 받았습니다편지로 받은 이름은 당신이 여기에서 그녀에게  것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이름이었습니다나는 항상 나의 이름을 내가 가야  길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친구의 말을 들었을  마음의 동요가 일어났습니다내가 혼란스러워졌을  나를 인도하기 위하여 나는 나의 이름을 사용해왔습니다당신이 우리에게 주는 이름의 중요성은 진정 무엇입니까?  

“비라, 이 멍청한 인간. 이름에 속지 말라. 그대는 항상 뭔가를 잡고 싶어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뭔가 큰 것을 만들어내고 싶어한다. 내가 그대들에게 준 이름들은 연인들의 달콤하지만 사소한 말들과  똑같다. 이름을 가지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지 말라.  

실제로 내가 일단 그대에게 이름을 주면, 다시 와서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 절대로 나에게 묻지 말라, 나는 잊어버리기 때문에. 내가 그것의 의미를 창조하는 것은 바로 그 순간 속에서이다. 그후 어떻게 나보고 다 기억하라는 말인가? 내가 틀림없이 3만 개 이상의 이름은 준 것 같은데.

이름은 그냥 이름일 뿐이다. 그대는 이름이 없다. 그 어떤 이름도 그대를 제한하지 않으며, 그 어떤 이름도 그대를 제한할 수 없다. 그것들은 그냥  사용되는 라벨일 뿐이다 – 실용적으로 사용될 뿐이지, 그 안에 무슨 영적인 의미는 없다. 그러나 내가 그대의 이름에 아주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그것을 그대에게 설명하기 때문에, 그대는 그것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것은 단지 나의 관심을 그대에게 쏟아붓는 나의 방식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내 사랑을 그대에게 보여주는 나의 방식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Osho, The Diamond Sutra,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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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태어나는 순간, 그대의 첫 호흡에서부터 조건화가 시작된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부모들이 그대를 조건화시킬 것이며, 그대가 함께 노는 아이들이 그대를 조건화시킬 것이며, 이웃들이 그대를 조건화시킬 것이며, 학교, 교회, 국가가 그러할 것이다. 의식적으로는 조건화가 그다지 많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아이는 계속해서 조건화를 축적해간다. 아이는 모방에 의해 배운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라. 이것이 세상의 보통 상황이다: 모든 사람들은 조건화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조건화를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어렵다. 그것은 옷을 벗는 것과 다르며, 그것은 그대의 피부를 벗기는 것과 같다. 그것은 어렵고 힘들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조건화와 동일시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자신을 오로지 가톨릭교도, 공산주의자,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기독교도로만 알고 있다. 그래서 조건화를 버리는 것에 대한 가장 큰 두려움은 그대가 정체성의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러므로 산야스다.   

산야스는 그대가 끝없는 혼돈에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지 않도록 그대를 도와주는 방책에 불과하다. 나는 그대의 조건화들을 제거한다 – 그대는 매우 텅 빈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 나는 당분간 가지고 놀 거리를 그대에게 주어야만 한다.

산야스는 당분간 가지고 놀 그런 장난감이다. 그러나 산야스는 결코 그것이 조건화가 되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그대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여전히 재미있으며  그것은 여전히 스포츠다 – 여전히 그대는 그것의 증인이다.

조건화를 버리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대의 과거 전체, 그대의 마음, 그대의 에고, 그대인 모든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만약 그대가 준비가 되어 있다면, 만약 그대가 용기가 있다면, 만약 그대가 나와 함께 갈 만큼 충분한 배짱이 있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Osho, Be Still and Know,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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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산야신들이 전체적으로, 또한 각성, 명상이라는 절대적인 조건을 가지고,  삶을 살기를 바란다. 우선 명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그러면 그대는 모든 유해한 씨앗이 있는 그대의 무의식을 정화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대 안에는 부패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고 나서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라.”

Osho, The Dhammapada: The Way of the Buddha, 6권. 4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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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매우 온정적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대에게 모든 지침을 줄 것이고, 그는 모든 책임을 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대에게 길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는 길에서 그대를 지도할 것이고, 그대는 오로지 따라가야만 한다.

스승은 그대가 자신을 따르는 것에 관심이 없다. 정반대로, 그대는 그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자기자신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하는 일은? 실제로, 그가 하는 모든 작업은 부정적인 것이다. 그는 그대의 의지물, 그대의 지주를 파괴한다. 그는 그대로 하여금 모든 종류의 두려움, 걱정, 도전들의 공격을 받기 쉽게 만든다. 이것은 완전히 부정적인  것이다.   

긍정적인 것에 관한 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거울일 뿐이다.  

그는 그대가 가까이 와서 그의 거울에 그대의 얼굴을 보는 것을 허용한다. 그는 그대가 모방해서 그의 얼굴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그대가 그를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그는 아무 생각이 없다. 그것은 거울에서 모든 먼지들이 제거되었음을 뜻한다. 그의 거울은 깨끗하다. 그대는 가까이 가서 볼 수 있으며, 그대는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것이다. 거울은 그저 비출 뿐이다; 그것은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은 행동이 아니다.

그대와 나의 관계는 확실히 독특하다. 우선 그것은 관계가 아니다. 그대는 거울과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대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감사해할 수 있다 – 그러나 그것은 관계가 아니다. 거울이 그대와 무슨 관계를 가질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거울은 단지 거기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 어떤 가능한 방법으로도 관계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관계라는 것은 유일하다. 왜냐하면 만약 그대가 다른 종교로 간다면, 스승 – 우선 그는 진정한 스승이 아니지만 그들은 그를 스승이라 부른다 – 소위 스승은 그대를 위해 위대한 일을 할 것이므로 그는자신의 수많은 요구가 이행되어지도록 강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다. ‘스승’은 이행되어져야 할 조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조건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거기에는 비난이 있게 된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조건을 이행한다면, 거기에는 칭찬과 보상이 있게 된다.

나는 그대를 비난할 수 없으며, 나는 그대에게 보상을 줄 수도 없다 – 왜냐하면 나는 그대가 이행해야 할 그 어떤 조건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대의 결정이다. 그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대의 스승으로 나를 받아들인 것은 그대의 결정이지, 그것은 나와 아무 상관 없다. 나는 개종자들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기독교 선교사가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나의 사고방식으로 나의 삶의 방식으로 바꾸겠금 애쓰지 않는다. 전혀 애쓰지 않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난 35년 동안 나는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을 것이다. 그들은 개종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개종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그대의 결정이다. 항상 기억하라,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그것은 그대의 결정이라는 것을.

만약 그대가 산야신이라면, 그것은 그대의 결정이다.

만약 그대가 산야스를 버린다 해도, 그것은 그대의 결정이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다시 받는다 해도, 그것은 그대의 결정이다.

나는 모든 것을 그대에게 맡긴다.

그러므로 그것은 독특한 관계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일방적이다; 내 쪽에서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 사실을 아주 분명히 해야 한다: 내 쪽에서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Osho, From Unconsciousness to Consciousness,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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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나의 사람들을 사로잡을 딴 방도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미 분리되어 있었다. 그것은 개방된 세계가 아니다: 누군가는 기독교도이고, 누군가는 힌두교도이고, 누군가는 회교도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나는 이러한 폐쇄적인 무리로부터 나의 사람들을 찾아내야 했다. 그러나 그들 무리로 들어가기 위해 나는 그들의 언어로 말해야 했다. 서서히, 서서히 나는 그들의 언어를 버렸다. 그에 비례해서 나의 메시지는 점점 더 명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를 서서히 나는 버렸다.

나의 산야스를 받은 후, 나는 나를 떠나고 싶어하는 그 누구라도 떠날 수 있는 이 3년간의 공백기간을 주었다 – 왜냐하면 나는 그 누구의 삶도 간섭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대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다면, 다행이다. 만약 내가 그대와 그대의 존재를 고양시킬 수 없다면, 그대가 나를 떠나는 것이 더 낫다.”

Osho, From Personality to Individuality,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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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야스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종교가 되어가는 것을 중지했을 뿐이다. 운동은 끊임없는 변화다; 그것이 바로 운동의 의미다. 즉 그것은 움직이고 있고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죽어 있다 – 그것은 움직임을 중단했으며 성장을 중단했다. 그것은 죽어 있다. 그것을 위한 유일한 장소는 화장터다….

모든 성직자들은 죽어 있는 종교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측 가능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단지 교리문답에 불과할 뿐이다. 그 어떤 견해도, 그 어떤 진전도, 그 어떤 성장도 없다. 기독교를 한번 보라: 이천 년이 흘렀다 –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보다 1인치라도 더 나아갔는가? 붓다 이후로 25세기가 흘렀다 – 불교도들은 단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아갔는가? 이것은 성장을 저해하고 있으며 진전을 저해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사람들이 열려 있고 살아 있고 성장하며 항상 신선하고 새로운 상태로 지내기를 바란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현상, 즉 종교성을 지닌 상태이다: 그것에는 그 어떤 라벨도 붙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라벨들은 마침표이기 때문에. 나는 마침표를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나는 세미콜론조차도 좋아하지 않는다: 삶은 항상 진행 중이니까….

나는 말라를 철회했다. 그것이 인도에서는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인도에서 붉은 옷과 말라는 산야신의 상징으로 모든 종교에 의해 수 천 년간 사용되어져 왔기 때문이다. 나는 산야스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박멸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산야신은 독신이어야 하고, 산야신은 여자와 접촉하지 말아야 하고 여자에게 말을 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전통 개념이기 때문에. 산야신은 가족들과 집에서 지낼 수 없고 그는 사원에서 지내야 한다. 그는 하루에 오로지 한 번만 식사를 해야 하고, 그는 계속해서 거듭 단식을 해야 한다. 그는 자기자신에게 고통을 주어야 한다. 이것은 병이다.

나는 이러한 산야신의 이미지를 박멸하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붉은 옷을 선택했던 이유다. 그리고 나에게는 인도에 거의 30만명의 산야신들이 있다. 나의 산야신들은 전통적인 산야신들 사이에서 엄청난 문제를 자아냈다. 왜냐하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나의 산야신들이 길을 걷고 있으면, 사람들은 그들이 독신주의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채 그들의 발을 만지곤 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여자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루에 두 번 식사를 하며, 그들은 최상의 모든 것들을 먹는다 – 그것이 이탈리아 음식이든, 중국 음식이든, 일본 음식이든 상관 없이. 이 사람들은 21세기의 사람들이며, 내가 자신들의 이미지를 박멸했기 때문에 올드 산야신들은 매우 분개했다.

우리가 서구로 가게 되면서 이제 붉은 옷과 말라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서구에서는 그것들이 결코 종교의 상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인도에서 제 기능을 해 왔을 뿐. 이제 산야신은 아내와 함께, 아이들과 함께 있을 수 있고, 그는 사회에 기생충이 될 필요 없이 일하고 창조하고 돈을 벌 수 있으며, 그는 숭배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그리고 특히 그대에게는 이제 모든 외부적인 상징들이 전혀 없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종교성의 본질적인 핵심인 내면의 여행뿐이다. 그것은 오로지 그대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내가 그대를 대신해서 그것을 해 줄 수 없으며, 아무도 그대를 대신해서 그것을 해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종교성의 가장 근원적인 본질만이 남아 있다. 즉, 명상….

그래서 이제 그대는 더 이상 그 어떤 외부적인 상징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만약 그대가 산야신이 되고 싶다면 그대가 기억해야 할 것은 꼭 한 가지, 즉 지켜보는 수련으로 들어가는 방법뿐이어서, 그것은 좋다. 그렇지 않으면 붉은 옷을 입고 말라를 거는 것으로 그대가 산야신이라는 대만족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옷이 누군가를 변화시키지도 못할 뿐더러, 말라 역시 누군가로 하여금 변형을 겪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대는 자기자신을 속일 수 있다.

이제 나는 그대로부터 그 모든 것을 제거하고 오로지 간단한 한 가지만 남겨놓고 있다. 그대는 속일 수 없다: 그대가 그것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산야신이 아니다. 그래서 그 운동은 그것의 가장 순수한 상태, 가장 본질적인 상태에 이르렀다; 그것은 중단되지 않았다.”

Osho, From Bondage to Freedom, 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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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자신이 산야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틀렸다 – 그대는 산야신이다. 산야신이 아닌 산야신들이 있다; 산야신인 비산야신들도 있다. 산야스는 외면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어떤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 3주를 즐길 수 있다면, 그대는 이미 입문한 것이다. 이 3주는 그대의 삶 전체를 바꿔 놓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가 비산야신이라는 생각을 버려라. 누구라도 너무나 열려 있어 접촉하기가 쉽고 아주 편견이 없으면, 여기를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코뮨,  코뮨의 진심, 코뮨의 사랑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 입문이 이루어진다. 외부적인 입문은 그 자체의 시간을 따라야 할지도 모르고 급한 것이 없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따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상관없다. 무슨 문제가 일어나겠는가!”

OshoFrom Bondage to Freedom, 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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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야신이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산야신이 되는 것이 문제다.

나의 산야신이 되는 것은 분명 어느 정도의 헌신, 어느 정도의 내맡김을 필요로 한다. 또한 나는 그대가 자신을 나에게 내맡기거나 나에게 헌신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가 자신을 자연에 내맡기고 존재계에 헌신하기를 원한다. 그대는 나의 산야신이 될 필요는 없으며, 그대는 오로지 산야신이 되어야만 할 뿐이다 –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의 산야신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Osho, Beyond Psychology,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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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산야스는 완전히 다른 운동이 될 것이다: 그것은 보다 더 진정한 구도자들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사회에 넌더리났기 때문에 그 사회를 바꾸고 싶어하는 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자들은 산야스 코뮨 만큼 대안적인 사회를 원한다 – 그러나 그들은 진리에 대한 욕망도 동경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사회에서 사람들이 붉은 옷을 입고 있다는 단지 그 이유로 – 그는 이상하게 보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 그는 붉은 옷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산야신이 된다.

그러나 그의 현실은 그가 정말로 지겨워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는 이 큰 세상으로부터 도망만 치고 있다는 것이다. 코뮨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었다.

이제 산야스는 학교, 즉 신비 학교가 될 것이다. 성장하고 변화하고 싶어하는 자들만 이 학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더 의식적으로 되기를 원하며, 자신들이 잠이 덜 깬 무의식 상태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그러니까 비록 몇 명의 다른, 올드 산야신들이 사라진다 해도, 걱정하지 말라; 새로운 산야신들, 신선한 피가 들어오게 될 것이다.

Osho, The Path of the Mystic, 3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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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당신은 사람들을 산야스에 입문시키고 제자를 만드는 것을 그만 두셨습니까? 제가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기회가 없어져버렸습니까?

“제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자는 되어야 한다.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대는 먼저 그 사람에게 묻는가? 그대는 먼저 그 사람의 허락을 받는가? 사랑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다. 사랑은 어떤 명령에 복종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허락을 받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것은 어떤 방식이나 방법을 믿는 것도 아니다.

제자의 신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의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이름이다. 만약 그대가 나를 사랑하고 싶다면 어떻게 내가 그대를 중지시킬 수 있겠는가? 만약 그대가 나에 대한 사랑으로 눈물을 흘린다면, 어떻게 내가 그대를 중지시킬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그대가 내가 명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뛰어든다면 어떻게 내가 그대를 중지시킬 수 있겠는가? 누가 제자가 되고 싶어하건 간에 그 누구도 그를 중지시킬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누군가를 제자로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형식적 절차들을 내가 버린 이유이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어떤 다른 경로를 거치지 않고 오로지 자발적으로 나에게로 오는 자들만 원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전체 책임은 그대의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들은 1학년 학생들을 가르친다; a는 apple의 a고, g는 Ganesh의 g다. 실제로, 전에는 g가 Ganesh의 g였지만 지금 그것은 당나귀인 gadha의 g다. 그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지금 Ganesh라는 단어가 교과서에 나오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또한 Ganesh 역시 g나 gadha와 아무 상관 없다. 그것은 단지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일 뿐이다. 아이는 gadha나 Ganesh가 더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g라는 문자에 아무런 흥미도 없다. 그러나 서서히, 서서히 gadha도 잊혀질 것이고, Ganesh도 잊혀질 것이고, 오로지 g만 남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g만 쓰여질 것이다.

만약 그대가 계속 apple의 a, Ganesh의 g를 읽어야만 한다면, 그대가 대학을 들어갈 즈음에는 공부할 기회가 없게 될 것이다. 하나의 완전한 문장을 읽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읽은 후에도, 그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몇 마리의 당나귀나 가네쉬나 망고가 문장 속에 있을 것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의 교과서에는 그림들이 있다: 색칠해진 그림들, 큰 그림들, 그리고 몇 개의 문자들. 그리고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그림들은 계속 점점 더 작아지고 문자들은 점점 더 많아진다. 서서히, 그림들이 다 사라지고 문자만 남게 된다. 대학 강의에서는 그림은 없고 오로지 문자, akshar만 있다.  

우리 단어인 akshar도 역시 매우 아름답다. 그것은 결코 파괴되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Ganesh도 파괴될 수 있고, gadha도 파괴될 수 있지만, akshar는 항상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을 제자로 만들기 시작했을 때, 나는 사람들을 산야스로 입문시켜야 했다. 그러나 얼마 동안이나 gadha와 Ganesh에 대한 농담을 떨 수 있겠는가; apple과 pineapple에 대해서는? 이제 산야스는 성숙했다. 이제 형식적인 절차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만약 그대가 사랑의 상태에 있다면, 제자가 되어라. 그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누군가에게 알릴 필요조차 없다; 만약 그것이 그대의 느낌이라면 산야신이 되라. 이제 전체 책임은 그대의 것이다. 이것은 성숙함의 표시다. 얼마동안 내가 그대와 함께 그대의 손을 잡고 걸을 수 있겠는가? 나의 손이 없어지기 전에, 그대가 자신의 손에 의지해서 스스로의 책임하에 자신의 발로 서서 걸을 수 있도록, 나는 그대의 손을 놓아야 한다.

그대가 제자가 되는 것을 그만 둘 필요는 없다. 그 어느 누구도 그대가 산야신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 그대 자신의 내면의 갈망과 요구에 따라 그것은 오로지 그대의 결정이다.

나는 그대와 함께 있고. 나의 축복이 그대와 함께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대에게 산야신이 되는 것에 관하여 그대에게 설명하지 않을 것이고, 혹은 그대에게 명상하라고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것만 많이 설명할 따름이다: 명상은 무엇인가라는 것. 만약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대 속의 갈망에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면, 그렇다면 명상하라. 이제 나는 그대에게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사랑을 설명만 할 것이고, 그밖에 다른 모든 것들은 그대에게 달렸다. 사랑에 대한 유일하고도 신비한 설명을 듣고서도 만약 아무 노래도 그대 가슴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그대에게서 노래가 나오라는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그 어떤 것도 나오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노래가 나온다면, 그것은 주고 받는 문제가 아니다: 그대는 제자가 될 수 있고,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있고, 그대는 산야신이 될 수 있고, 그대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고, 그대는 우리가 모크샤 라고 부르는 이생의 최고 보물인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대는 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 뒤에서 그대의 일을 추진시키는 누군가의 날들은 다 지나갔다. 이제 그대는 완전히 자유롭다. 그대 자신의 소망, 그대 자신의 기쁨, 그대 자신의 엑스터시가 결정 인자다.”

Osho, The Diamond Sword,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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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당신의 주위에서 몇 년 있고난 후 나는 스승-제자의 관계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제자의 관계에 대해 말씀 좀 해 주시겠습니까? 

“그런 것은 없다.

과거에 제자들은 조직을 만들었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이다,’ ‘우리는 회교도들이다,’ ‘우리는 하나의 종교, 하나의 신앙에 소속되어 있으며, 우리가 하나의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 자매들이다. 우리는 신앙을 위해 살 것이고 우리는 신앙을 위해 죽을 것이다.’라는 바로 이러한 것이 그들의 관계였다.

모든 조직들은 제자들 간의 관계에서 생겨났다.

실제로 두 제자들은 서로 전혀 관련이 없다.

각각의 제자들은 일개인의 자격으로 스승과 연관되어 있다.

스승은 수많은 제자들과 연관될 수 있지만, 그 관계는 개인적인 것이지 조직적인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그 어떤 관련도 없다. 그렇다, 그들에게는 다소간의 우정과 다소간의 애정이 있을 뿐.

나는 그것이 속박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계라는 단어를 피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우정’이라고도 부르지 않고 그냥 ‘친목’이라고 부른다 –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똑같은 스승을 사랑하며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길동무들이지만, 그들은 스승을 통해서 서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

제자들이 조직화되어 그들 간에 관계를 가지게 되고, 그러면서도 그들 모두 무지했다는 것, 이것이 과거에 가장 유감스러운 일이 되어왔다.

그리고 무지한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세상에 더 많은 폐를 만들어낼 수 있다. 모든 종교들이 딱 그런 일을 해왔다.

나의 사람들은 나와 개인적으로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은 길에 있기 때문에, 분명 그들은 서로 안면이 있게 된다. 친목과 정다운 분위기가 조성되지만, 나는 그것을 어떤 종류의 관계로도  부르고 싶지 않다.

직접적으로 서로 관계를 가지고 종교와 교파와 이교(異敎)를 만들어내어 서로 분쟁을 하는 제자들 때문에, 우리는 너무 많이 고통을 당해 왔다. 그들은 그밖에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

적어도 나와 함께 있으면서, 이 사실을 기억하라; 그대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서로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확고한 우정이 아니라 단지 유동적인 친목만으로 족하다 – 그것이 훨씬 더 아름답고, 미래에 인류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하나도 없다.”

Osho, Beyond Enlightenment,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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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입문이란 그대가 위험한 삶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는 어둠 속에서 나를 자신의 친구로 받아들였으며, 그대는 굉장한 신뢰를 가지고 그대의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 어떤 백지수표도 사용한 적이 없거니와 그 누구의 삶을 간섭한 적도 없다. 그것은 단지 그대의 편에서 일어난 일이고, 나는 완전히 그것에 벗어나 있다. 그것은 그대의 입문이고, 그것은 그대의 삶이 변형되도록 하기 위한 그대의 발심(發心)이다. 그러나 모든 행위와 그것에 대한 책임은 그대의 것이다.”

Osho, The New Dawn, 3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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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음이 그대의 유일한 추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가 산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시장통에서도 홀로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그대가 유일한 그대의 지켜보는 자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단지 의식적이고 깨어 있으며 지켜보는 것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면 그대는 어디에 있든지 간에 홀로 있을 수 있다. 그대는 군중 속에 있을 수도 있고, 산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별 차이가 없으며, 그대는 어디서나 똑같이 지켜보는 자이다. 군중 속에서 그대는 군중을 지켜본다; 산속에서 그대는 산을 지켜본다. 눈을 뜨면 그대는 존재계를 지켜본다; 눈을 감으면 그대는 그대 자신을 지켜본다.

그대는 유일한 한 가지, 지켜보는 자이다.

그리고 이 지켜보는 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실현이다. 지켜보는 자는 그대의 붓다성이며, 이것은 그대의 깨달음과 깨어남의 본질이다. 이것이 그대의 유일한 수련이 되어야 한다. 이것만이 그대를 제자로 만들어준다; 그대가 홀로임을 알게 되는 이러한 수련.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 그대를 제자로 만들어주겠는가? 그대는 삶의 모든 점에서 기만을 당해왔다. 스승을 믿는 것이 그대를 제자로 만들어준다는 말을 그대는 들어왔다. 이 말은 완전히 틀렸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제자가 되었을 테니까.  

누군가는 예수를 믿고, 누군가는 붓다를 믿고, 누군가는 크리슈나를 믿고, 누군가는 마하비라를 믿는다; 제자가 된다는 것이 스승을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누군가를 믿지만 아무도 제자가 아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대 자신, 그대의 진정한 자신이 되는 수련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Osho, The Invitation,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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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산야신이 되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대의 산야스가 그대 안의 명상성을 촉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명상이 없다면 산야스도 없다.

그대를 산야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오로지 상승하는 그대의 순수의식뿐이다 – 서서히, 서서히 하부의 중력을 벗어나며 상승하는.”

Osho, The Great Pilgrimage,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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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가 모든 게임들을 그만두기를 바란다 – 세속적인 게임들, 영적인 게임들, 인류 전체가 지금까지 해온 게임들. 이러한 게임들로 인해 그대는 정신 지체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게임들은 그대의 의식 성장과 그대 자신의 궁극적인 개화를 방해한다. 나는 그대를 방해하는 이 모든 쓰레기들을 싹 쓸어버리고 싶다.

그대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도록, 그대가 어떤 예언자에게 매달리지 않도록, 고탐 붓다가 그대를 구원해 주리라고 그대가 생각지 않도록, 나는 그대를 홀로, 완전히 홀로 남겨두고 싶다. 혼자, 완전히 혼자 남겨지면, 그대는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의 센터를 반드시 찾게 된다.    

다른 방법도 없고, 가야 할 곳도 없고, 그 어떤 조언자도 없으며, 그 어떤 선생도 없고, 그 어떤 스승도 없다. 힘들어 보이고 가혹해 보이지만, 나는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있다. 그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대를 전혀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자기자신을 사랑했으며, 그들은 자신의 주위에 많은 대중을 거느리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다 – 대중이 많을수록, 그들의 에고에 자양분을 받는 듯한 느낌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그것이 바로 내가 깨달음마저도 마지막 게임이라고 불렀던 이유이다. 그대가 그것을 더 빨리 그만 둘수록, 더 좋다. 왜 그냥 단순히 존재하지 못하는가? 왜 불필요하게 여기 저기 바쁘게 허둥대는가? 그대는 존재계가 그대로 하여금 되기를 원하는 바로 그 존재이다. 긴장을 풀고 그냥 편히 존재하라.”

Osho, Om Mani Padme Hum,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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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야신이 공식적으로 될 필요는 없다. 그 어떤 구도자라도 그냥 산야신이다. 그리고 산야신이라고 해서 나의 산야신이 될 필요는 없다. 산야신은 추종자가 아니라 기껏 길동무일 뿐이다. 만약 그대가 진리를 찾고 추구하고 있다면, 삶의 의미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Osho, Hari Om Tat Sat, 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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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산야스로 입문하는 날이 반드시 산야스의 시작인 것은 아니다. ‘나는 산야스가 나에게 일어나기를 기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단지 그대의 암시일 뿐이다. 입문이란 오로지 존재계에 대해 그대가 예스라고 말하는 것이며, 신선한 바람과 햇빛이 들어와 그대를 정화하고 그대로 하여금 존재계의 일부가 되게 하도록 그대의 모든 문과 창문을 여는 것일 뿐이다.  

어느 날 산야스는 시작될 것이다. 만약 그대의 강렬함과 온전함, 그대의 신뢰와 그대의 사랑이 전체적이라면, 산야스는 입문 순간에 시작될 수 있지만, 그건 드문 경우이다. 그것은 항상 60%, 50%; 70%, 30%… 99%의 신뢰를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러나 1%의 의심이면 수 년간 심지어는 몇 생을 방해하는데 충분하다. 만약 그대가 100% 열려 있지 않으면, 만약 no라는 바로 그 단어가 그대의 용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면, 산야스라는 위대한 혁명은 그대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산야스는 전적인 yes를 필요로 하며, 그러할 때 그것은 바로 이 순간에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작은 의심 – 그것은 단지 아주 작을 수도 있지만 – 은 그대 눈에 든 모래 한 알과 똑같으며, 그대는 눈을 뜰 수가 없다. 단지 작은 모래 한 알이 그대로 하여금 이 모든 아름다운 세상을 못 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의심은 그대 내면의 눈에 든 모래 한 알과 똑같다. 그것으로 인해 그대는 삶의 광휘와 아름다움, 그리고 몇 생 동안 성장하여 꽃 피기를 기다려왔지만 그대가 기회를 주지 않았던 그대 자신의 가능성과 그대 자신의 꽃을 보지 못할 수 있다.”

Osho, Om Shantih Shantih Shantih, 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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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제자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은 무엇입니까?

“전혀 아무 것도 없다.

열린 가슴, 사랑하는 마음, 자신에 대한 깊은 신뢰, 그밖에 다른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대는 어떤 스승에게 자신을 내맡길 필요도 없고, 그대는 어떤 신을 숭배할 필요도 없고, 그대는 어떤 가상의 신에게 기도를 드릴 필요도 없다. 그대는 자신 안에 감춰진 것을 찾기 위해 인간이 만든 절과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

제자는 스승의 씨앗이다, 제자는 또한 연꽃이며, 그것은 그대가 다른 어딘가에서 찾고 있지만 그대 자신 안에서는 찾지 않은 바로 그 꽃이다.“

Osho, Live Zen,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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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라도 수도승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나는 그대가 세상 속에 있기를 원한다. 명상을 24시간 할 필요는 없다; 명상은 단지 작은 일별일 뿐이며 – 그리고 나서는 그대의 일을 하라. 서서히, 서서히 그러한 일별이 그대의 행동 속에서, 그대의 침묵 속에서, 그대의 노래 속에서, 그대의 춤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할 것이다.

24시간 허비해서 기생충적인 존재가 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대가 사회의 기생충적인 존재가 될 때, 그대는 사회에 거역할 수 없게 된다. 그대는 그 어떤 미신에 반대하는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다.

나의 사람들은 산야신이 될 수 있으며, 그들은 그 누구에게도 의존적이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전적으로 반역적이다. 그들의 명상은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일이다.”

Osho, The Buddha: The Emptiness of the Heart,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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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에게 산야신이 되라고 가르친다 – 나의 산야신이 아니라. 그것은 그대의 산야스며, 그것은 그대의 진리에 대한 연구이다.”

Osho, Christianity: the Deadliest Poison and Zen, the Antidote to All Poisons,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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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야스가 외부적인 것이 될 필요는 없으며, 단지 그것에 대한 갈망이면 충분하다.”

Osho, Christianity: the Deadliest Poison and Zen, the Antidote to All Poisons,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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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도착하자, 시겐이 물었다, “그들이 너에게 뭔가를 맡겼느냐?”

세키토가 말했다, “그들은 나에게 아무 것도 맡기지 않았습니다.”

시겐이 말했다, “그러나 답장이 있었음에 틀림 없다.”

세키토가 말했다, “만약 그들이 어떤 것도 맡기지 않는다면, 답장이 없는 겁니다.” 그런 후 그가 말했다, “내가 여기를 떠나려 했을 때, 의자 밑에 있는 큰 손도끼를 받기 위해 내가 곧 돌아와야 한다고 당신이 덧붙여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 제발 나에게 큰 손도끼를 주세요.”

시겐은 침묵했고, 세키토는 절을 하고 물러났다.

“시겐의 침묵은 그가 세키토를 받아들이는 것, 즉 그의 용기였다. 세키토가 단지 ‘그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답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비록 그가 그 편지를 언급하지 않았다 해도, 시겐은 편지가 배달되지 않았다는 것,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겐은 그 남자를 보았는데, 그에겐 깨달을 만한 자질이 있었다. 그의 침묵이 그의 손도끼였다. 그가 말했다, ‘그대가 오면 나는 그대의 머리를 손도끼로 벨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에게,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 제발 나에게 큰 손도끼를 주세요.‘란 말을 상기시켰다. 나의 목을 베라. 그대가 하고 싶어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라, 나는 준비되어 있다.

시겐은 침묵했다. 그 깊은 침묵 속에서 횃불의 전승이 있다. 그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에너지 전승의 문제이다. 오로지 그 침묵 속에서 불길이 시겐에게서 세키토로 옮겨붙었다.    

그리고 그는 불길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즉시 절을 하고 물러났다. 이제는 스승을 방해할 필요가 없다. 그는 받아들여졌다. 단순히 받아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이르른 마지막 단계가 전달되었다.

에노는 세키토가 깨닫기 전에 죽었다. 실제로, 세키토가 에노를 떠났던 순간, 그가 시겐에게 도착하기 전에, 에노는 죽었다.

그는 죽음이 가까워져 온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으며, 시겐은 세키토에게 전승 해 주는 사람으로 적절하다. 그는 자신의 판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옳았으며, 마침내 세키토를 깨달음으로 이끈 사람은 시겐이었다.  

그러나 깨달음은 침묵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나의 여기서의 모든 노력이 그대를 가능한 한 침묵에 들게 하려는 것의 이유이다. 그러한 때 그대는 시겐과 같은 사람조차도 필요 없다. 어느 곳에서나 – 그대의 방이나 나무 아래, 정원이나 강가, 어느 곳이든 – 앉아서 만약 그대의 침묵이 깊어지면, 존재계는 그대를 붓다의 경지로 입문을 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존재계로부터 막바로 일어날 때 그것은 스승을 통해서일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나는 그대에게 돈오(頓悟)를 가르친다. 그대가 행하고 있는 명상은 존재계가 그대 안에 불길이 될 위대한 침묵을 그대에게 준비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Osho, God Is Dead, Now Zen Is the Only Living Truth,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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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대는 계속 고상한 말을 한다: ‘,,,그러나 왜 내가 나의 이름을 바꿔야 하는 거지?’ 왜 안된단 말인가? 그것은 그대로 하여금 자신이 독일인이라는 것을 잊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것이 산야스 네임을 받는 이유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단지 그대가 이전 이름에 의해서 나타나는 이전의 자신 전체를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상징적이다. 그대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이름은 그대의 아버지, 그대의 어머니, 그대의 주변 사람들에 의해 받은 것이다. 이제 그대는 모든 조건화를 다 버렸는데, 왜 그러한 조건화가 그대에게 주었던 이름은 버리지 못한다는 것인가?

그대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어떤 것이라도 가능할 것이다. 이름이 반드시 어떤 의미를 가질 필요는 없다. 그것은 대중 속에서 그대를 알아보고 부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대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만들 수도 있지만, 그대가 바뀌어져야만 한다. 바뀌지 않으려는 그대의 고집은 자신의 내면의 생각을 나타낸다: ‘겉으로는, 내가 모든 조건화를 버린 게임을 하라.’ 그러면서 그대는가짜 이름을 버릴 준비조차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의 이름을 바꾸는 것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대가 자신의 과거와 절연될 수 있도록 새로운 상징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내가 말하는 것은 단지 자비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왜 내가 나의 이름을 바꿔야 하고 산야신이 되어야 하는가…’ 그대는 산야신의 의미를 이해하는가? 그것은 단지 구도자를 의미한다.

그대는 구도자가 되고 싶지 않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그대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게다가, ‘…왜 나는 내 이름을 바꿔야 하고 산야신이 되어야 하며, 그 어떤 권위도

필요 없다고 말하는 스승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두 가지: 첫째, 스승은 주위의 다른 길이 아니라, 제자를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그대는 그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제자는 자신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 지복의 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스승을 받아들일까 말까 하는 것이 그대 손 안에 있다는 이런 생각을 누가 그대에게 심어주었는가?”

“…구도자는 자신의 신임장, 기다릴 수 있는 능력, 인내력을 보여줘야 한다. 왜냐하면 여정은 길고 길은 매우 좁기 때문에. 제자가 가슴의 진실과 혼자가 되는 위험을 알 수 있을 때에만 스승은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다…스승은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할 때,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그대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스승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산야신이 되고 싶지 않다면…아마도 그대는 산야신도 일종의 종교라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것도 역시 사람들을 등록시키는 새로운 운동일지도 모른다고 여길지도. 그것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대가 진리를 찾고 있다면, 그대가 진리를 알든 모르든 간에 그대는 산야신이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모든 조건화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대는 산야신이다. 만약 그대가 명상을 해서 그대의 의식을 최상의 가능성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면, 그대는 산야신이다. 그대가 ‘산야신’이란 단어의 뜻을 알든 모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단어의 오래된 의미는 진리를 찾아 세속을 떠난 자였다. 그 단어에 대한 나 자신의 의미는 세속에 살면서 여전히 계속해서 진리를 찾는 자이다. 그대가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곳이 다 세속인데. 

나는 그 사람들이 세속을 떠나서 어디로 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 히말라야로? 그 곳 역시 이 세상의 일부, 우리 지형의 일부이다. 세상 밖의 장소를 찾기 위해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세상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이 세상 안에 있으며, 그 곳을 벗어날 길이 없다. 유일한 길은 그대 자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대는 세상을 벗어나 있다. 만약 세상이 그대 안에 없다면 – 아무런 욕망도, 아무런 동경도, 아무런 권력에의 의지도 없다 – 만약 이 모든 넌센스가 그대의 내면 세계로부터 사라지고 그 곳이 완전히 텅 비게 되면, 그대는 세상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 곳은 세상 속에 있지 않는 유일한 곳이다.

그러나 그대의 몸에 관한 한 그것은 세상 안에 있을 것이다. 나는 항상 이 사람들이 가곤 했던 곳이 어디인지 궁금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세상을 발견할 것이다.”

“…올드 산야신, 산야신의 구개념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나는 그대에게 세상을 등지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그대에게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으로 하여금 그대 속에 살게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물 속의 연꽃잎이 되라 – 그러나 물은 꽃잎을 적실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전세상 사람들이 명상의 어떤 맛을 보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유일한 가능성이다; 그렇지 않다면…이전의 산야스는 잔존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를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은 의미가 없다. 그대는 독립적이었으며, 그대는 자신자신의 시간을 가졌다; 그대는 몇 시간 동안 일하고 그리고나서 그대는 자기자신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세상을 등진 이 불쌍한 사람들, 그들의 모든 시간은 사소한 것들을 부탁하고, 거절당하고, 모욕당하고, “꺼져버려, 다른 곳으로 가라구.”라는 말을 듣는 것에 허비되었다. 이 사람들은 존엄을 추구했지만 그들이 찾은 것은 완전히 모욕뿐이었다.”

Osho, Om Mani Padme Hum, 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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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그렇다면. 앞으로 장래에 산야신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지금부터 앞으로 산야신이란 이 곳의 명상기법들로 입문했으며 그가 그 길을 따를 것이라고 자기자신에게 약속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이고 홀로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자기자신을 책임질 것이다. 그것은 집단이나 집회가 되지 않을 것이다.”

Osho, The Last Testament, 3권,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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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야스는 그들이 단지 명상의 길과 기쁨의 삶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것은 그대의 삶을 지복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산야스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산야신들은 계속될 것이다. 나는 산야신들의 모든 외부 상징들을 버렸다. 만약 그들이 그것들을 계속 지니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달렸다. 내 쪽에서는 버렸다. 그들은 그 어떤 말라도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붉은 옷이 필요하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는….그들에게 주는 나의 조언은 만약 그대가 산야신이라면 오로지 명상만이 그대가 지녀야 할 유일한 본질이라는 것뿐.”

Osho, The Last Testament, 3권,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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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을 독특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산야신들로부터 없애버렸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 붉은 옷을 입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모든 색깔이 가능하다. 나는 그대의 구세주나 예언자나 메신저가 아니기 때문에 내 사진이 들어 있는 말라를 걸 필요는 없다.’

나는 그대에게 제시해 줄 그 어떤 신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그대에게 자기자신을 아는 과학을 제공해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대는 단지 내가 친구일 뿐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나는 그대들 중 한 사람일 뿐이므로, 숭배할 필요도 없고, 그대자신을 한 집단의 일부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대는 모두 다 개인들일 뿐이다.”

Osho, The Last Testament, 3권,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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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탐험해야 할 곳이 내면만 남아 있게 하기 위해, 외부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대가 버리도록 나는 열심히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마음은 매우 미숙하다. 그것은 외부적인 상징들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것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나는 나의 사람들이 그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기를 원한다. 전통에 의해 그대에게 주어져서 그대가 그것을 단지 믿음으로 받아들여온 그대의 옷이나 그대의 외부적인 규율이나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대 속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마인드를 벗어나 의식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종교적이지 않다.   

그러나 우선 외부적인 것들에 너무나 사로잡혀 있는 세상과 함께 하기 위해, 나도 또한 외부적인 것들을 가지고서 산야스를 시작해야 했다. 그대의 옷을 주황색으로 바꾸고, 말라를 걸고, 명상을 하라는 것. 그러나 가장 주안점은 오로지 명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옷들은 매우 쉽게 바꿀 수 있지만 자신의 마인드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말라를 걸 수는 있지만 자신들의 의식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주황색 옷을 입고 말라를 걸고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산야신이 되었다고 믿기 시작한다.   

산야스는 그렇게 싸구려가 아니다. 그러므로 산야스의 시작 단계가 끝날 수 있을 만큼 그대는 충분히 성숙하다.  

나는 나의 사람들이 비본질적인 것들에 빠져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선 처음에는 그것이 필요했다. 이제 수 년간 내 말을 듣고서 나를 이해한다면, 그대는 모든 외부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내면으로 나아갈 때에만 그대는 처음으로 진짜 산야신이 될 수 있다.”

Osho, The Last Testament, 6권,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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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야스 운동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것도 아니다.

내가 여기에 없었을 때도 그것은 여기에 있었다. 내가 여기에 없을 때에도 그것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산야스 운동은 단지 구도자들의 운동을 의미한다.

그들은 항상 여기에 있어왔다.

일련의 구도자들은 항상 존재해 왔다. 나는 그것을 산야스라고 부른다. 그것은 영원하다. 그것은 나와 아무 상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기여를 해왔다. 나도 또한 내 자신의 몫을 기여했다.  

그것은 계속 점점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내가 죽고 나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것을 더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나는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산야스 운동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내가 그대에게 진리를 줄 수는 없지만, 나는 그대에게 달을 보여줄 수는 있다… 제발 달을 가리키는 내 손가락에 집착하지 말라. 이 손가락은 사라질 것이다. 달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고 구도는 계속될 것이다.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존재하는 한, 산야스의 꽃은 계속 피어날 것이다…

첫째, 나는 역사를 통틀어 그대에게 개인성을 부여한 유일한 사람이다. 소위 구루들은 정반대로 하고 있다: 그들은 그대의 개인성을 빼앗아가고 있다. 그들의 모든 노력은 그대가 그들에게 내맡기게 하는 것이다. 그대의 역할은 단지 그들의 발을 만지고 그들의 축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노력은 전혀 다르다. 그대는 누군가의 발을 만짐으로써 그 어떤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반대로, 그대는 그 사람의 에고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그를 병들게 만드는 것이다.

에고는 그의 영혼의 암이다. 그 어느 누구도 병들게 하지 말라. 자비로워져라. 결코 그 누구의 발도 만지지 말라…

나의 노력은 그대가 생각의 움직임조차도 없는 궁극적인 침묵의 상태… 노마인드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그대의 마음에서 모든 전통. 정통성, 미신, 신앙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대 의식의 호수에 잔물결 하나 없는.  

그리고 전체적인 것은 그대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 나는 ‘단지 나를 따르라. 나는 구세주다. 나는 너희를 구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허튼 소리다. 그대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대를 구원할 수 없다. 그리고 영적인 독립이야말로 독립이라고 부를 가치가 있는 유일한 독립이다.”

Osho, The Last Testament, 6권,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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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말라 입문 아카데미에게 주는 마지막 메시지

“오쇼는 말라를 더 이상 걸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입문 아카데미에 보낸다. 산야스는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외면적인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에 관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혼란스러워 했는데 이것이 오쇼에게 다시 받아들여져서 아카데미에 다시 전달된 그의 응답은: “만약 그대가 말라를 걸어야 한다면, 집에서 명상을 할 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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